저자 임 민 혁(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우리가 사는 지역인 일산(성산촌)에 역사 인물이 한 분 계시다. 그 분이 바로 홍이상(1549~1615)이다. 호가 모당이며, 경상북도 안동의 한 지역인 풍산이 본관이다. 모당 선생은 1549년 9월 18일 고봉아래 귀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장 서경이며 어머니는 문경백씨이다. 모당 선생은 안동김씨와 혼인하였다. *귀이동 성산촌(연재 일산 고봉산 아래 마을)
모당 선생은 매우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죽조차 못 먹을까 근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모당선생은 반딧불이와 흰눈을 등불로 삼아 학문에 정진한 끝에, 드디어 1579년 문과에 장원하는 영예를 안았다. 모당 선생은 그 후 꾸준히 서울에서 공무원인 관료 생활을 하였다. 20여년 관료 생활 후 모당 선생은 ‘걸군소’를 임금께 올렸다. 걸군소는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으로 내려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글이다.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면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부모가 나에게 바란 바요, 내가 부모를 위해 원한 바” 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부귀영달을 염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모님을 위한 사랑과 효도의 실천이었다. 모당이라는 호도 아버지를 사모하는 정이 그치지를 않아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모당 선생은 매우 영특한 자질을 타고났다. 4세에 벌써 글자를 알았으며, 7세에는 스승 이식께서 그 아이의 비상함을 알아채고 <소학>을 가르치니, 암송한 것은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20세 부터는 습정 민순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의리에 철저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의 이치를 탐구했다. 31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하였을 때, 선조 임금과 당시 최고의 학자들은 그의 문장을 보고 당세에 가장 뛰어난 참 선비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그 뒤 이조 좌랑, 참의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 참의로 임금을 호위하였고,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형조 참판, 대사헌에 이르렀다. 모당 선생은 52세 때에 당시 최고의 지성인 성균관대사성(지금의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모당 선생이 정치활동을 할 당시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편이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당 선생은 스스로 엄격하게 중립을 지켰다. 1589년 정여립을 중심으로 반란을 꾀한 사건이 벌어졌다. 모당 선생은 스승을 배반한 정여립을 가차 없이 꾸짖었다. 그리고 당시 정치상황이 마치 강물 한가운데에서 난파된 배와 같다고 진단하고는, 여론에 관계없이 자기편의 이익만을 추구 하는 당쟁의 해로움을 없앨 것을 힘껏 주장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임금께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하여 정치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당 선생은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고 오로지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들의 안정된 삶에 헌신한 정치가였다. 썩은 물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모당 선생은 홀로 우뚝 선 깨끗한 몸가짐의 충신이요, 백성들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모당 선생은 45세(1602년) 때 안동부사(지금의 안동 시장)로 내려 가셨다. 모당 선생은 이미 가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훌륭하신 원님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모당 선생은 어머니를 위해 즐거운 잔치를 자주 베풀 었다. 그가 지은 시를 보면, “팔십일세 되신 어머님 거 처하시는 뜰 가운데, 북과 피리소리가 어루어져 저녁하 늘에 가득하구나” 라고 했다. 구경꾼들은 보기 드문 태 평성세라며 기뻐하였다.
왜구가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모당 선생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강원도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그는 “이제 난리가 난 때를 당해서 의병의 선창이 되어 강토에 요사스럽고 간사한 기운을 맑게 하기로 맹세하고 나라를 회복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의병을 이끌고서 전쟁에 참여했다.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신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의리의 실천은 생명보다 더 중요했다. 모당 선생은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겪었다. 하루 빨리 승리하여 이 곤경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의승군 제도를 구상하고 실천했다. 각 고을에서는 일정한 수효의 군병들을 차례대로 입대시키고 그 나머지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수확한 양식을 공급하게 했다. 군사와 농사꾼의 역할을 분별해 운영한 이 방식은 일정기간 동안 성공을 거두었다. 영의정 서애 유성룡은 이 공적을 임금께 아뢰고서 크게 치하했다. 모당 선생이 나라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의승군 제도를 실시한 것은 편안하고 한가한 태도를 버리고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투철한 애국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모당 선생은 65세쯤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소나무 숲을 쳐다볼 수 있고 조그마한 축대가 있는 물가에다 정자 하나를 지었다. 정자 이름은 ‘악양정’이다. 이곳에서 날마다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시를 읊고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이같이 속세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였으나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셨다.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 한을 남긴 채, 모당 선생은 1615년(광해7년) 9월 19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연세는 67세였다. 고양의 고봉 선영에다 장사지냈다.